◈ 월드컵이 끝나자, ◈
여름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월드컵 동안 놀러 오던 친구들의 화제는 온통 월드컵뿐이었다. 술 퍼마시고 버스 위에 올라갔네 어쨌네 하는 식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6월이 지나갔다.


날이 더워지자 기저귀엔 땀이 차기 시작했고 살들이 썩어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복용하는 약 중에 MGO(산화마그네슘)가 있었는데 이 약의 작용은 장이 수분 흡수하는 것을 방해해 변이 묽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환자였으니 이런 약이라도 복용해 변비를 해결해야 했다(사실 지금도 복용하고 있다). 이 약은 효과가 느리지만 부작용이 적어 장기간 변비약을 복용해야 하는 환자들은 거의 이 약이 처방되었다. 문제는 가끔 너무 지나쳐서 묽은 설사를 하면 욕창 부위에 감염이 우려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사를 한다 싶음 이 약을 먹지 않았는데 또 약을 먹지 않으면 변비가 지속되어 아락실을 먹는 극약 처방을 했었다. 아락실은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서 배변을 유도하는 약이었기 때문에 배가 아팠다. 배가 아프기도 하고 변비약을 먹었으니 언제 거사를 치를지 몰라 아락실을 먹으면 물리치료를 내려가지 않았다.


물리치료를 시작한 지 시간이 좀 지나서 많이 적응을 했다. 왼쪽 어깨도 상태가 양호해져 만세를 할 수가 있었다. 그전에는 만세 자세를 하면 팔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었는데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이제 어깨 상태도 나아졌으니 악력 운동을 했다. 팔을 많이 사용하지 않으니 당연히 힘도 약해지고 섬세한 손동작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악력 운동기구를 손에 쥐고 조물락 거리면서 운동을 하거나 손에 핀셋을 들고 시침핀이나 작은 쇠구슬 같은 것들을 옮기는 운동을 했다. 이 즈음 해서 간병인 여사님께서 사정이 생겨 못 나오신 날이 있었다. 동생이 학교는 가야 하니 친구 K양이 와주었다. K양과 작업치료실에 갔을때 친구는 작업치료실의 풍경을 퍽 낯설어 했다. 내가 핀이나 쇠구슬 옮기는 운동을 하고 뇌병변 장애를 입은 환자들은 그림책을 읽고 8피스 퍼즐을 맞추는 것을 보면서 데면데면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난, 운동치료실 매트에 앉아서 운동을 할 수도 있었고(물론 간병인 여사님이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가슴과 무릎으로 날 서포트해주셨다) 자전거도 탔다! 혼자 앉아있는 연습도 가끔 했었는데 픽픽 쓰러져버려서 연습 자체가 되지 않았었다. 자전거는- 운동치료실 다니면서 나의 로망이었다. 나도 자전거 타고 싶다고 말하면 선생님은 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미루곤 하셨는데 그 자전거를 타게 된 것이었다. 자전거는 다섯 단계로 강도를 조절할 수 있고 의자에 앉아서 페달(?)을 밟는 식이었다. 하지마비 환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운동기구라서 페달(이라고 편의상)에 25-30센티 정도 되는 막대에 찍찍이가 붙은 끈이 달려 있었다. 발이 빠지기 않게 고정시키는 역할이었다. 처음 자전거를 타던 그때의 두근거림이란! 하지만 로망은 로망일 뿐이었다. 비록 왼쪽 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강도를 1단계에 놓고도 밟는 것이 쉽진 않았다. 땀이 정말 많이 흐르고 평소 움직이지 않던 근육들을 사용하니 당기기도 많이 당겼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 흥.


병원에 입원한 지 석 달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진짜 목욕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비누칠을 해 물수건으로 닦는 식의 야매 목욕을 했다. 운동치료실에서 15분 자전거를 타고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어서 간병인 여사님은 매일 야매 목욕을 시켜 주셨다. 나를 간병하는 것이 힘들다고 세 분이나 관두시고 마지막으로 오신 분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와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을 자녀로 두셨다. 나와 동생을 정말 이뻐하셨는데 집에서 맛난 음식이라도 하시는 날엔 꼭 싸오셔서 나와 동생에게 먹이셨다. 내가 밥도 잘 안 먹고 남길까 봐 점심시간 동안 내가 밥 다 먹는걸 보고 식사하러 내려가시기도 했다. 딸내미처럼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시고 많은 분이 나를 간병하는 것이 버거워 관두셨는데도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신 분이다. 겨울에 나 혼자 휠체어를 타고 기저귀를 떼면서 내 간병을 그만두시고도 병실에 자주 찾아오시던 고마운 분. 물론 지금도 연락을 드리며 지낸다. 그간 언니는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고 여사님은 아기를 돌보느라 간병을 그만두셨다. 놀러 오던 내 친구들 이름까지 기억하시면서 신경 써주시던 분. 여사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참 아련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내 신경외과 주치의는 7월에 들어서자 욕창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욕창으로 인한 치료가 길어질수록 환자에겐 이롭지 못하니 수술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도 살이 차지 않고 썩기만 하니 아예 수술을 하자는 거였다. 수술이요? 별거 아니다. 성형수술인데 금방 끝날거다, 집에다 연락 좀 하고요, 그래 네가 내 환자 중에서 지금 최고 오래된 환자라는 거 아니냐, 네.


그래서 난 성형수술을 하게 되었다.
by _푸훗_ | 2005/11/09 14:37 | -- 병원, 300일.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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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상철 at 2005/11/09 16:35
병원, 300일 잘 읽고 있습니다.
(밑줄 긋는 남자 포스팅에 비밀글 남겨놨는데 확인해보세요~)
Commented by 봄날의곰 at 2005/11/09 17:01
아니, 갑자기 왠 성형인가요? 너무 심하게 썩어들어가서 그런 건가요? 아무튼, 여름에 욕창이라니, 정말 고생하셨네요.[허헛]
Commented by _푸훗_ at 2005/11/09 18:49
상철 / 네, 읽었어요. 가서 봤더니 책은 2000원인데 배송료가 3000원 이더라구요. 다른 필요한 책이 생기면 같이 구입하려고요. 뭐 그때까지 그 책이 날 기다려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고맙습니다.


봄날의곰 / 네, 살이 너무 심하게 썩어가고 새살이 차오르지는 않고 소독하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역부족이라 느꼈는지 성형수술을 권유했어요. 이래뵈도 내가 성형미인이라는 것 아니겠어요, 깔깔(뻔뻔).
Commented by 에우 at 2005/11/09 19:06
300일중..겨우 3달이 지나간거군요..그 간병인 여사님 정말 좋은 분이시네. 그대 너무 인복이 많은거 아네요? :)
Commented by 석원군 at 2005/11/09 20:40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 별일 없으셨는지요?
Commented by 모두루 at 2005/11/09 22:52
다른글은 안봐도 병원일지는 빼놓지 않고 꼭 보게됩니다
환자가 바로 눈앞에 아니 내가 꼭 환자가 된 기분이랄까요
다시겪고 싶지않을 고통일텐데 그 고통으로 이렇게 생생한 글을
쓰게 된다니,,,참 인생은 아니러니해요 ^^
Commented by laystall at 2005/11/10 01:13
눈을 감았다가. 뜹니다. 한참 고민해도 뭐라 쓸 것인지 결정되지 않아서 졸다 깼슴다.
Commented by 사흘나기 at 2005/11/10 02:43
지금같이 건강해지셨다면(제 마음대로 상상해서) 은혜를 갚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그나저나 저도 운동 좀 해야 하는데, 요즘 시도때도없이 졸려서요.
Commented by 개울 at 2005/11/10 12:56
마이링 타고 들어왔다가 "병원, 300일" 카테고리의 글들을 주루룩 다 읽어버렸어요. 글이 굉장히 생생하고 살아있네요. 재밌기도 하고요. ^^

앞으로도 종종 들를께요~
Commented by _푸훗_ at 2005/11/10 15:48
에우 / 그러게요, 이제 겨우 석달이 지나간거에요. 간병인 여사님 정말 좋은 분이죠? 나중엔 작은 딸내미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방긋. 생각해보면 내가 인복이 참 많아요.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 고맙고요.


석원군 / 여행 잘 다녀오신거에요? 여행기 풀어놔야죠! 참, 내 선물 사왔어요(미쳤다)?


모두루 / 그 정도로 생생하게 읽고 계시다니 고마워요. 그리고 인생이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은 삶의 진리아니겠어요. 푸훗.


레이스톨 / 방긋.


사흘나기 / 그때에 비하면 용 된거죠. 방긋. 운동 열심히 하세요. 건강은 넘칠 때는 모르지만 모자라면 아쉬운 거에요. 건강할때 관리 잘 하세요.


개울 / 안녕, 개울. 마이링이 조금 더 활성화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_^ 글을 재밌게 읽어 주시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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