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한여름의 시작 ◈
머리가 무지하게 크던 인턴은 다른 과로 옮겨가고 상냥하고 이쁜 인턴이 왔다.


병원에서 나를 맡는 의사나 간호사는 내가 어떻게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다 알았다. 그놈의 차트, 흥. 그래서 과도한 관심을 보이거나 괴물 취급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기 때문에 꽤 불편했었다. 과잉 친절에서 느껴지는 그 인위적 관심은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차라리 괴물 취급받는 것이 속 편했지. 어쨌든 8월을 함께 한 인턴, K언니와는 자연스러운 교류가 이뤄졌다. 가느다란 몸으로 강단 있게 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사실 보진 못했다. 난 여전히 엎드려 있었으니) 괜히 신뢰도 생기고 믿음이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여튼, 이 당시 나의 큰 과제는 바로 변비였다. 그래서 병원에 들르는 야쿠르트 아줌마에게서 슈퍼100을 하루에 하나씩 사 먹었다(뭐 그렇다고 변비가 크게 나아진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위안이지). K언니도 내 상태가 걱정이 되었는지 언제부터인가 병실에 올 때 불가리스나 닥터캡슐 같은 요구르트를 슬그머니 놓고 갔다. 주치의와 함께 있어도 몰래 주고 다른 환자들이 볼까 봐 또 몰래 줬다. 남자 친구(나중에 결혼도 했다)도 같은 병원 인턴이었기 때문에 언니가 비번일 때도 병원에 자주 들렀는데 그때도 병실에 들러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고 요구르트를 먹인 다음 동생을 데리고 나가 밥을 사주곤 했다. 둘이 연애하는데 동생은 뭣 하러 데리고 나가냐고 하면 남자 친구가 동생을 이뻐하니깐 꼭 데리고 나가야 한다면서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서로 책도 바꿔 읽고 이야그도 많이 하면서 참 가까워지니, 언제부턴가 언니가 나에게 꼭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뭐냐고 물어도 웃기만 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뭘까 뭘까 한참 궁금하던 어느날이었다. 오후5시 즈음해서 언니는 기타를 멘 남자를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다. 짠- 선물이야, 하면서 꺄르륵 웃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분은 기타를 꺼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CCM이었다(뭐 잘은 몰랐지만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노래를 몇 곡 부르곤 손을 잡고 기도를 하셨다. 낯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 기타를 들고 병원까지 와주었구나, 라고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났다(그래도 우는 건 창피해서 꾹 참았다). 기도를 마치시곤 K양이 이야기를 많이 했다면서 보고 싶었다고, 언니가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님이라고 하셨다. 난 고맙다고 언니에게 거듭 인사를 했고 언닌 진작에 해주고 싶었는데 전도사님 시간 맞추느라 늦었다며 미안해했다. 하하, 이렇게 쓰니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한쪽에선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선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라니! 푸훗.


2002년 징그럽게 더웠다던 그해 여름, 난 이렇게 따신 선물을 받고 수술 부위가 호전되고 있었다.
by _푸훗_ | 2006/01/24 21:37 | -- 병원, 300일.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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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푸른별리 at 2006/01/24 22:03
멋진 인턴언니와 멋진 전도사님이시군요 :D 누군가 날 위해 악기를 치며 노래 불러주면, 아, 어떤 기분일까요. CCM이든 랩이든 뭐든 짠-하고 눈물날 것 같으려나요.
Commented by 봄날의곰 at 2006/01/24 23:31
그렇게 멋진 장면에선 주인공이 살짝 눈물을 보여야, 더욱 드라마틱 하다고요.[웃음] 아무튼,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hyo519 at 2006/01/25 01:28
정말 따뜻했었겠어요. 힘든 기간이였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네요^^
Commented by woody79 at 2006/01/25 06:25
예전 제 블로그 보르헤스 관련글에 덧글을 남기셨더라구요. 이 새벽에 찾아왔다가 병원 글 모두 읽고 갑니다. 종종 들릴께요^^
Commented by laystall at 2006/01/25 09:47
복도 복도 우째 그리..
Commented by 모두루 at 2006/01/26 13:45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던~~~
심 수봉 노래가 생각나네요
그런데 왜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변비가 심한 걸까요?
(누구나 알고 있는 걸 나만 모르고 있나?)
Commented by 에우 at 2006/01/26 17:30
나도 심각한데..( --)/
Commented by _푸훗_ at 2006/01/26 21:56
별리 / 방긋. 정말 감동이었어요, 뭐랄까 아무도 못찾는 곳에 버려졌는데 갑자기 구원의 손길이 나타난 기분과 비슷. 푸훗. 이 멋진 언니는 지금 내과레지던트로 있답니다.


봄곰 / 그래도 눈물은 창피해요. 푸훗.


효519 / 이렇게 읽어도 되나요? 흠흠, 어쨌든. 소중한 사람을 많이 만나서 귀한 시간이었어요. ^_^


우디79 / 지금 가서 찾아 보니깐 올드보이와 보르헤스의 교차에 대한 글이죠? 흥미로웠어요. (앗싸, 팬이 생긴걸까?) 혼자 김칫국을, 쿠쿡. 반갑습니다.


레이스톨 / 부럽죠? 깔깔. 착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복이 많은 거라구요(라고 말하곤 뜨끔한다).


모두루 / 그런 심수봉 노래는 몰라요, 여기서 바로 세대차이- 랑랑. 예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여성의 장 길이가 더 길어서 그렇다고 한듯.. 뭐 이것은 카더라 통신이라서 믿을만한 것은 안되지만요;;


에우 / 운동해요! 깔깔(본인은 하지도 않고 한 적도 없으면서 운동하란다, 허허).
Commented by 푸르미 at 2006/01/26 22:40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오웅.
Commented by _푸훗_ at 2006/01/26 22:44
내가 영화 좀 찍었죠! 깔깔.
Commented by hyo519 at 2006/01/27 00:21
이러다 이거 영화되는거 아닐까요? 라고 조심히 생각해봅니다.
찡한 휴먼드라마?
Commented by _푸훗_ at 2006/01/27 19:23
영화화되면 돈 받는거죠? 랑랑.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혼자 즐거운 '돈 상상' 좀 했슴돠. 쿠쿠.
Commented by 덧말제이 at 2006/01/30 20:07
틈틈이 좋은 분들 만나신 거 보면 역시 세상엔 괜찮은 사람들이 적지 않지 라는 틀에 박힌 생각하게 되네요. ^^;
Commented by _푸훗_ at 2006/01/30 21:16
네, 정말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서 난 행운아 같아요. 틀에 박힌 생각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숨 쉴 여유가 남아있는 거잖아요. 기운내요, 덧말제이. 나도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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